후지와라노 사네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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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와라노 사네스케는 일본 헤이안 시대의 귀족으로, 후지와라노 타다토시의 아들이자 오노노미야 가문의 가주였다. 그는 90세까지 장수하며 50년 동안 일기 《쇼유키》를 작성했고, '현명한 우다이진'으로 불렸다. 사네스케는 무라사키 시키부의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에 등장하며, 미치나가와 복잡한 관계를 가졌다. 그는 1021년 우다이진에 임명되었고, 1037년 종1위에 서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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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57년 출생 - 왕단 (북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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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사네스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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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족 | 후지와라 북가오노노미야류 |
이름 | 후지와라노 사네스케 |
한자 표기 | 藤原 実資 |
로마자 표기 | Fujiwara no Sanesuke |
별칭 | 현인우부(賢人右府) 호: 오노노미야(小野宮) |
생몰 | 957년 ~ 1046년 2월 26일 |
관직 정보 | |
관위 | 종1위, 우대신 |
주군 | 레이제이 천황 엔유 천황 카잔 천황 이치조 천황 산조 천황 고이치조 천황 |
가계 | |
아버지 | 후지와라노 타다토시 |
어머니 | 후지와라노 마사후미의 딸 |
양아버지 | 후지와라노 사네요리 |
형제 | 타카토오 카이헤이 사네스케 |
배우자 | 미나모토노 코레마사의 딸 엔시 여왕(婉子女王, 타메히라 친왕의 딸) 미나모토노 요리사다유모의 딸 |
자녀 | 료엔(良円) 딸 치후루/치코 칸라쿠(観薬) 딸 |
양자 | 스케히라 스케타카 스케요리 츠네스에 |
기타 정보 | |
시대 | 헤이안 시대 중기 |
아명 | 다이가쿠마루(大学丸) |
2. 생애
藤原斉敏|후지와라노 타다토시|vertical-align=sup일본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사네스케는 할아버지인 사네요리의 양자가 되어 오노노미야 가문(小野宮家)을 상속받았다. 1021년 우다이진(우대신)이 되었고, 관습과 의례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켄진 우후''(賢人右府, 현명한 우다이진)라고 불렸다.[1] 50년 동안 일기 ''쇼유키''(小右記)를 썼으며,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무라사키 시키부의 일기에서 사네스케는 범상치 않은 인물로 칭찬받았으며, 그의 미신적인 행동에 대한 여러 사례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구조류에 대항하는 오노미야류의 당주로서 활약했지만, 만년에는 양자인 스케히라에게 가독 계승과 가령 보존을 위해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요리미치 부자에게 구두를 신청하는 등 구조류에 대한 유연한 행동도 보였다.[6]
에이쇼 원년 (1046년)에 90세로 사망했다. 신앙심 깊은 불교도였지만, 임종의 순간까지 현실 사회에서 활약하는 것을 좋아했고, 죽음에 임해서도 출가하지 않았다. 사네스케가 천수를 다할 때, 오노미야 저택에는 조야 상하의 사람들이 참집하여 소리를 내어 통곡했다고 한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藤原斉敏|후지와라노 타다토시일본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인 사네요리의 양자가 되어 '실(実)' 자를 받았다. 사네요리의 사랑을 받아 가령(家領) 대부분을 상속받고, 오노노미야 가문(小野宮家)을 계승했다.안와 2년에 서작되었다. 같은 해 시종에 임명되었고, 덴로쿠 2년 우효에노사가 되었으며, 덴로쿠 4년 우쇼쇼가 되었다. 엔유 천황 때인 덴겐 4년 구로도노토에 임명되었다. 에이칸 원년 사츄조로 전임되었고, 에이칸 2년 카잔 천황 즉위에 따라 다시 구로도노토가 되었다. 칸나 2년 카잔 천황의 퇴위 및 이치조 천황 즉위에 따라 구로도노토에서 물러났으나, 에이엔 원년 다시 구로도노토에 임명되었고, 에이소 원년 산기(參議)가 되어 공경 반열에 올랐다.
2. 2. 관직 진출과 활약
안와 2년 (969년)에 종5위하에 서작[1]되었다. 같은 해 시종에 임명되었고, 덴로쿠 2년 (971년)에 우효에노사, 덴로쿠 4년 (973년)에 우쇼쇼가 되었다. 엔유 천황 때인 덴겐 4년 (981년) 구로도노토에 보임되었다. 에이칸 원년 (983년) 사츄조로 전임되었다가, 같은 해 2년 (984년) 카잔 천황 즉위에 따라 다시 구로도노토가 되었다. 칸나 2년 (986년) 카잔 천황의 퇴위 및 이치조 천황 즉위에 따라 구로도노토에서 물러났지만, 에이엔 원년 (987년)에 다시 구로도노토에 보임되었고, 에이소 원년 (989년)에 산기가 되어 공경 반열에 올랐다.조호 3년 (1001년) 곤다이나곤에 임명되어 우코노에노다이쇼를 겸임하였다. 이후 사네스케는 42년 동안 우다이쇼 지위에 있었다.
칸코 8년 (1011년) 이치조 천황이 붕어하고 산조 천황이 즉위했다. 산조 천황과 미치나가는 사이가 좋지 않아 곧 완전히 대립하게 되었다. 조정 신하 대부분은 권세가인 미치나가에게 아첨하고 천황은 고립되어 조정의 기강은 날마다 이완되었다. 이때도 사네스케는 공정한 입장에 힘썼고, 천황도 은밀히 사네스케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산조 천황의 황태자 시절 춘궁대부였던 후지와라노 카이히라는 사네스케의 친형으로, 관위 승진은 동생에게 크게 뒤처졌지만 형제간의 사이는 좋았고 사네스케의 양자 스케히라는 카이히라의 친자였다. 이 때문에 천황은 카이히라를 통해 사네스케에게 의지하려 했다.[2]
산조 천황에게는 동궁 시절부터의 뇨고로 미치나가의 딸 켄시와 후지와라노 스미토키의 딸 세이시가 있었다. 즉위와 함께 켄시는 츄구가 되었지만 자식이 없었고, 세이시는 아츠아키라 친왕을 낳았다. 조와 원년 (1012년), 천황은 세이시를 황후로 세우려 했지만 미치나가를 꺼려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미치나가로부터 입후 제안이 있었다. 그런데 입후 의식 날이 되자 미치나가는 방해하여 같은 날을 츄구 켄시의 참내일로 하고 참석하지 않았고, 여러 공경들도 이에 동조하여 모두 츄구의 토산조다이로 가 버렸다. 천황은 칙사를 토산조다이로 보내 출석을 명했지만, 여러 공경들은 칙사를 조롱하고 산기 후지와라노 마사미츠는 기와 조각을 던지는 지경이었다. 사네스케는 이날 병환이었지만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없고, 땅에 두 명의 주인이 없다"라고 말하며 주나곤 후지와라노 타카이에와 함께 참내하여 의식을 거행했다.[3]
산조 천황은 사네스케의 태도에 감사하며, 사네스케의 양자인 스케히라에게 "짐은 오랫동안 동궁에 있어서 세상 물정을 몰랐고, 일단 등극하면 모든 것이 뜻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왕비를 세우는 것조차 모두 좌대신(미치나가)을 꺼려 칙명에 응하려 하지 않는다. (사네스케의) 충성을 가상히 여긴다. 이제부터 모든 일, 대장과 의논하고 싶다"라고 전했고, 이것을 들은 사네스케는 기뻐하였다. 하지만, 현명한 사네스케는 미치나가와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올바른 태도를 관철했다. 산조 천황도 스케히라를 구로도노토로 임명한다고 약속했지만 미치나가를 꺼려 흐지부지하게 하는 등, 그다지 믿음직하지 못했다.
미치나가와 대립을 계속한 산조 천황은, 결국 조와 5년 (1016년)에 아츠아키라 친왕을 동궁으로 하는 조건으로 고이치조 천황에게 양위했다. 춘궁대부에는 사네스케가 추천되었지만, 사네스케는 노쇠한 몸이라며 굳이 사양했다. 이듬해 칸닌 원년 (1017년)에 산조 상황이 붕어하자, 약속은 파기되어 미치나가의 책략으로 아츠아키라 친왕은 동궁을 사퇴했다.
칸닌 3년 (1019년) 토이의 입구를 격퇴한 다자이곤노소치·후지와라노 타카이에가 부하들에 대한 은상을 간청했고, 이에 대해 제국 신청 잡사정이 공경들에 의해 행해졌다. 다이나곤·후지와라노 킨토와 주나곤·후지와라노 유키나리는 "그들은 추토의 칙부가 도달하기 전에 싸웠다. 그러므로 사적인 싸움이므로 상을 줄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이는 귀족들이 타카이에가 미치나가의 정적인 후지와라노 타다치카의 동생이기도 한 점 때문에 미치나가를 추종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관 통치를 유지하는 입장에서 당시 각지의 호족이나 재청관인이 무장화하여 세력을 확대해가는 현상에 위기감을 느꼈던 것도 배경에 있었다. 칙부 없이 군사 행동을 허용하면 그들이 조정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판단으로 군사 행동을 일으킬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에, 킨토·유키나리 등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다.
이에 대해 사네스케는 칙부가 도달하기 전에 싸운 점에는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칙부가 도달했는지는 문제가 아니다. 설령 칙이 없었더라도, 훈공 있는 자를 상으로 하는 예는 모든 일에 있다. 칸페이 6년 (894년)에 신라의 흉적들이 쓰시마 섬을 습격했을 때, 시마노카미·후모토노 요시토모는 즉시 이것을 격퇴하고 상을 받았다. 이것과 같은 것이다. 특히 이번 사건은, 외적이 경고소에 육박하고, 각 섬의 사람들이 천 명이나 유괴되어 수백 명이 살해되었다. 이키노카미·후지와라노 리타다도 전사했다. 그러나, 다자이후는 즉시 군대를 움직여 이것을 격퇴했다. 어찌 상을 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만약 상을 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서서 일에 임하는 용사가 없어질 것이다"라고 변론했다.
먼저, 다이나곤·후지와라노 사이노부가 이에 동의하고, 이어서 킨토·유키나리도 의견을 바꾸어, 마침내 공경들은 모두 의견을 같이 하여 포상은 결의되었다. 당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미치나카도 이것을 긍정했다. 이때 사네스케는 우대신으로 임명될지 여부로 동료들의 환심을 사야 하는 시기였지만, 부화뇌동·아첨추종하지 않고, 사물의 도리를 유창하게 진술하고 있다.
이 해 3월에 미치나가가 출가한 데다가 젊은 섭정·후지와라노 요리미치의 역량 부족도 있어, 정무가 정체되어 있었다. 이 상황에서 6월에 사네스케는 요리미치로부터 11개국으로부터의 신청 잡사를 태정관에서 심의·결정하도록 명해졌다.[4] 사네스케는 이 명령을 받고,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제국으로부터의 신청을 조의에 부쳐 일거에 해결함과 동시에, 토이의 입구에 관한 다자이후로부터의 각종 신청에 대해서도 대응을 결정했다. 사네스케의 조의에서의 솜씨에 대해, 이것을 지켜보던 미치나가·요리미치로부터 대단한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이 일련의 경위를 받아, 자신의 출가에 따라 사네스케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 것을 미치나가에게 이해받은 것으로 인해, 사네스케의 대신으로의 길이 열렸다는 지적이 있다.[5] 치안 원년 (1021년) 5월 좌대신·후지와라노 아키미츠의 사망에 따른 인사 이동으로, 마침내 사네스케는 우대신으로 승진했다. 쵸로쿠 원년 (1037년) 종1위에 서임되었다.

항상 구조류에 대항하는 오노미야류의 당주로서 활약했지만, 만년에는 양자인 스케히라에게 가독 계승과 가령 보존을 위해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요리미치 부자에게 구두를 신청하는 등, 구조류에 대한 유연한 행동도 보인다.[6] 특히 사네스케는 요리미치에게 지대한 호의를 품었던 것 같고,[7] 『소우기』에는 요리미치를 비판하는 기사는 거의 없고, 요리미치 쪽도 정계의 원로인 사네스케에 대한 경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경보임에 따른다.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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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와 2년 (969년) | 2월 22일: 종5위하 (원복일에 칙서). 6월 25일: 시종 (사(佐)로 토키토모 우효에노스케를 대신함) |
안와 3년 (970년) | 1월 27일: 승전 |
덴로쿠 2년 (971년) | 3월 20일: 우효에노스케 (사(佐)로 토키토모 소나곤을 대신함) |
덴로쿠 4년 (973년) | 7월 26일: 우근위 소장 |
덴엔 2년 (974년) | 1월 7일: 종5위상 (사로의 노고). 1월 20일: 오미곤노카미 |
조겐 2년 (977년) | 1월 7일: 정5위하 (소장(少將)의 노고) |
텐겐 2년 (979년) | 1월 29일: 이요곤노카미 |
텐겐 3년 (980년) | 1월 7일: 종4위하 (소장(少將)의 노고), 환승. 7월 25일: 종4위상 (황태후궁의 날에 거처, 환어 본궁 후, 임시 휴식소로 서술) |
텐겐 4년 (981년) | 2월 14일: 구란도노카미 (사이미츠를 대신함) |
텐겐 5년 (982년) | 1월: 비고노스케. 3월 11일: 중궁 료 겸임 (입후 날, 중궁・후지와라노 준시) |
에이칸 원년 (983년) | 12월 13일: 좌근위 중장 (료는 이전과 같음) |
에이칸 2년 (984년) | 2월 1일: 미노곤노카미. 8월 27일: 지두(천조(踐祚)), 구란도노카미 |
간와 원년 (985년) | 12월 24일: 중궁 대부 (중궁・후지와라노 준시), 중장(中將)은 이전과 같음 |
간와 2년 (986년) | 6월 23일: 지두(선양), 승전. 7월 22일: 정4위하 (임시) |
에이엔 원년 (987년) | 11월 11일: 구란도노카미 (야스치카를 대신함) |
에이엔 2년 (988년) | 8월 29일: 오미곤노카미 |
에이소 원년 (989년) | 2월 23일: 산기 |
쇼랴쿠 원년 (990년) | 1월 29일: 미사사카곤노카미. 8월 30일: 종3위 |
쇼랴쿠 2년 (991년) | 9월 23일: 좌병위독 |
조토쿠 원년 (995년) | 4월 28일: 게비이시 벳토. 8월 28일: 권중납언, 우에몬노카미. 9월 5일: 벳토는 이전과 같음. 9월 28일: 태황태후궁 대부 (태황태후・쇼시내친왕) |
조토쿠 2년 (996년) | 7월 20일: 중납언, 독・대부 등은 이전과 같음. 7월 21일: 벳토는 이전과 같음. 9월 19일: 별도 및 독을 사임 |
조호 원년 (999년) | 1월 7일: 정3위 (중납언의 노고, 토키미츠를 초월). 12월 7일: 대부를 그침(궁의 붕괴에 의함) |
조호 2년 (1000년) | 11월 21일: 종2위 (조궁 행사 포상, 카이츄를 초월) |
조호 3년 (1001년) | 8월 25일: 권대납언, 겸 우근위대장 |
조호 5년 (1003년) | 2월 26일: 정2위 (이시가노 교행(石賀行幸) 행사 포상) |
칸코 4년 (1007년) | 1월 28일: 아찰사 |
칸코 6년 (1009년) | 3월 4일: 대납언, 대장사(大將使)는 이전과 같음 |
조와 원년 (1012년) | 날짜 불명: 아찰사(按察使)를 그만둠 |
치안 원년 (1021년) | 7월 25일: 우대신. 7월 28일: 우대장은 이전과 같음. 8월 29일: 황태제부 겸임 |
만주 3년 (1026년) | 4월 1일: 청련차 |
초겐 3년 (1030년) | 11월 16일: 선지, 여러 절회에 열을 따르지 않고 옆구리에서 상참할 수 있는 자 |
조겐 9년 (1036년) | 4월 17일: 황태제부를 그만둠 |
조랴쿠 원년 (1037년) | 1월 5일: 종1위. 3월 27일: 대장 사임을 청하였으나, 칙(勅)으로 허락하지 않음 |
조큐 4년 (1043년) | 11월 2일: 대장 사임 |
칸토쿠 원년 (1044년) | 6월: 상표로 신분을 청하였으나 불허 |
에이쇼 원년 (1046년) | 1월 18일: 훙거 |
2. 3.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와의 관계
미치나가는 사네스케가 기록한 일기에서 그의 소행에 대해 강하게 비판받았다. 예를 들어, 풍요로운 국으로의 수령 임면권이 미치나가의 권익이 된 점[11], 친형인 가이헤이를 제쳐두고 어린 노리미치가 조궁행사소별당에 임관된 것[12] 등이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시모무카이 류히코는 사네스케가 미치나가를 비판하면서도, 이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거나 미치나가에게 직접적으로 표현한 적은 거의 없다고 지적하며, "세상살이도 능숙하다"고 평가했다. 사네스케는 미치나가 일가의 횡포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성인의 가르침"으로 삼았다고 한다.한편, 미치나가의 능력과 인물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으며, 미치나가도 사네스케를 주목했다는 기록도 있다.
- 조와(長和) 원년(1012년) 미치나가가 병에 걸렸을 때, 사네스케를 포함한 5명이 기뻐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자, 미치나가는 사네스케와 미치쓰나에 한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사네스케를 안도하게 했다[13][14][15].
- 산조 천황의 병과 고이치조 천황의 유년으로 중단되었던 관주(관청에 올리는 상소)가 부활하여 사네스케가 직사(관청의 사무)를 맡았을 때, 미치나가는 아들 노리미치가 사네스케의 작법을 배우지 않은 것을 한탄했다[16][17].
- 사네스케는 섭정이 된 미치나가가 병으로 위중해졌을 때 "조정의 주석(柱石)"을 잃을 것을 우려했다[18].
미치나가가 "이 세상은 내 세상이라 생각하니, 둥근 달이 흠 없이 떠오르네"라는 와카(일본의 전통적인 정형시)를 선보였을 때, 미치나가는 사네스케에게 화답하는 노래(반가(返歌))를 지어주길 요청했다. 사네스케는 백거이가 원진의 시를 절찬하며 화답하지 않고 반복해서 읊었던 고사를 예로 들며, 다른 공경들과 함께 그 노래를 여러 번 읊었다.
장보 원년(999년), 쇼시가 입내할 때, 조정에서 공경들에게 와카를 모집하여 붓글씨를 쓰게 하는 병풍을 준비했다. 사네스케는 미치나가로부터 재촉을 받았음에도 "대신의 명을 받들어, 그 병풍에 노래를 짓는 것은, 아직 전례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이는 병풍가를 만드는 것은 전문적인 가인이 하는 일이라는 인식과, 쇼시가 중궁이 아니었기 때문에 공경이 봉사해야 할 공사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태황태후와 쇼시 내친왕이 병환 중이었기 때문에 와카를 짓는 것을 삼가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 사네스케는 병풍의 색지에 공경들의 이름(휘)이 적혀 있었던 것을 "후대에 면목을 잃을 것이다"라고 비난했다(『쇼유키』 장보 원년 10월 30일 조). 이는 당시 공경은 통상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관명 등으로 호칭했지만, 천황이나 후의 어전 외에서는 이름만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미치나가는 사네스케의 행동에 불쾌감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오히려 사네스케를 직려로 맞아들여 의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사네스케는 까다로운 성격이었지만, 호색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지단』에는 사네스케가 자신의 저택 근처 우물에서 물을 긷는 하녀들 중 마음에 드는 여자를 방으로 끌어들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후지와라노 요리미치는 이를 이용하여 사네스케에게 물통을 돌려달라고 요청하며 짓궂게 놀렸다고 한다. 또한 사네스케와 후지와라노 노리미치가 유녀를 두고 다툰 이야기도 전해진다.
2. 4. 만년과 죽음
藤原斉敏|후지와라노 타다토시|vertical-align=sup일본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사네스케는 할아버지인 사네요리의 양자가 되어, 오노노미야 가문(小野宮家)을 상속받았다. 1021년에는 ''우다이진''(우대신)이 되었고, 관습과 의례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켄진 우후''(賢人右府, 현명한 우다이진)라고 불렸다. 50년 동안 일기 ''쇼유키''(小右記)를 썼으며,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무라사키 시키부의 일기에서 사네스케는 범상치 않은 인물로 칭찬받았으며, 그의 미신적인 행동에 대한 여러 사례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사네스케는 구조류에 대항하는 오노미야류의 당주로서 활약했지만, 만년에는 양자인 스케히라에게 가독 계승과 가령 온존을 위해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요리미치 부자에게 구두를 신청하는 등 구조류에 대한 유연한 행동도 보였다.
에이쇼 원년 (1046년)에 90세로 사망했다. 신앙심 깊은 불교도였지만, 임종의 순간까지 현실 사회에서 활약하는 것을 좋아했고, 죽음에 임해서도 출가하지 않았다. 사네스케가 천수를 다할 때, 오노미야 저택에는 조야 상하의 사람들이 참집하여 소리를 내어 통곡했다고 한다.
사네스케는 오노미야가의 재산을 대부분 친딸 센코에게 계승하게 하고, 양자인 스케히라에게는 일부만 계승하게 했다. 이 때문에 사네요리로부터 계승했다고 생각되는 가령은 분산 계승되어, 원정기에는 공중 분해되었다.
3. 평가
사네스케는 관습과 의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켄진 우후(賢人右府, 현명한 우다이진)'라고 불렸다. 50년 동안 일기 ''소우키''(小右記)를 썼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자신의 일기에서 그를 범상치 않다고 칭찬하며, 그의 미신적인 행동에 대한 여러 사례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 일기에서 사네스케는 여러 차례 엑소시스트를 불러들였고, 병이나 악몽을 치료하기 위해 아이들을 고용하여 징을 치게 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32세에 의정관이 된 유능한 관료였으며,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와 후지와라노 요리미치의 상담 상대였다. 의례에 대해서는 엄격하여, ''소우키''에서는 의례에 실패한 자를 "어리석음 위에 또 어리석다"라고 엄하게 비판하는 기술이 있다. 1016년 조와 5년 고이치조 천황 즉위 당시에는 봉폐사에게 들려 보낼 관부 작성 작업 감독을 맡았다. 그러나 부하의 실수로 관부에 태정관 인이 찍히지 않은 것이 포함되었다. 사네스케는 실수를 유발한 소납언 후지와라 서정을 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인이 찍히지 않은 관부가 사용되는 것에 대해서는 의식이 끝났으니 어쩔 수 없다며, 만약 섭정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에게 뭔가 지적받으면 자신에게 말하라고 언급하는 등, 실무면에서는 유연한 운용을 보였다.
4. 가족 관계
- 자녀
관계 | 이름 | 비고 |
---|---|---|
딸 | 성명 미상 (985년 - ?)[22] | 미나모토노 코레마사의 딸 소생 |
아들 | 료엔(良円) (983년 - 1050년) | 관녀 소생 |
딸 | 후지와라노 치후루/치코 | 후지와라노 카네요리의 처, 미나모토노 요리사다의 유모의 딸 소생 |
아들 | 칸라쿠(観薬) | 생모 미상 |
딸 | 성명 미상 (? - 990년) | 생모 미상 |
5. 관련 작품
- 빛나는 너에게 (2024년 NHK 대하 드라마, 배역: 아키야마 류지)
5. 1. TV 드라마
2024년 NHK 대하드라마 빛나는 너에게에서 로바토의 아키야마 류지가 연기하였다.[1]참조
[1]
서적
『小右記』
[2]
서적
『小右記』天元5年3月11日条
[3]
서적
『小右記』正暦4年3月28日・5月4日条
[4]
서적
『小右記』正暦元年12月26日条
[5]
서적
『小右記』寛仁3年6月17日条
[6]
서적
『小右記』治安元年7月26日条
[7]
서적
『西宮記』
[8]
서적
『小右記』長元2年9月24日条
[9]
논문
平安時代の大隅・薩摩 : 人の交流と交易・情報伝達を媒介にして考える
鹿児島県歴史資料センター黎明館
2004-03
[10]
간행물
〈エッセイ〉上司としての藤原実資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2019-03
[11]
서적
『小右記』長和三年十二月二十日条
[12]
서적
『小右記』長和三年五月二十四日条
[13]
서적
『小右記』長和元年6月17日・20日・7月21日条
[14]
서적
藤原道長 : 男は妻がらなり
ミネルヴァ書房
[15]
서적
『小右記』長和5年5月10日条
[16]
서적
『小右記』治安元年11月16日条
[17]
서적
平安宮廷の儀礼文化
吉川弘文館
[18]
서적
『小右記』長和5年5月10日条
[19]
서적
『小右記』寛和元年4月28日条、正暦元年7月11日条
[20]
서적
『小右記』万寿2年3月8日・20日条、四十九の厄を迎えたという記述による。
[21]
서적
毛呂季光
埼玉県毛呂山町
[22]
서적
『소우기』 간나 원년 4월 28일조
[23]
서적
『소우기』 만쥬 2년 3월 8일, 20일 조의 49의 액을 맞이했다는 기술에 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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